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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암살사건 전말과 역사적 의미

by 기울기 3도 2025. 5. 18.

해방공간의 갈등과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총성은 짧았지만 그 파장은 깊고 길었다. 피습자는 여운형(呂運亨),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언론인,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꾀했던 대표적 중도 정치인이었다.

 

그가 누군가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해방 이후 남한 사회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본 글에서는 여운형의 생애,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 암살 사건의 경과 및 배후 의혹, 그리고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다룬다.

 

여운형 암살사건 전말과 역사적 의미

 

1. 여운형은 누구였는가?

1-1. 출생과 교육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수학하며 전통적인 학문에 익숙했으나, 이후 신교육과 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 후 적극적인 계몽과 운동에 뛰어들었다.

1-2.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여운형은 본격적인 민족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외교부 주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하여 조선체육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조선 최초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다.

 

2. 해방 후의 정치 행보

2-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부 부재의 혼란 속에서 여운형은 같은 해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다. 건준은 질서유지와 치안 확보를 목표로 전국 조직을 구성했으며, 145개 지부를 통해 사실상 조선 전역의 행정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2-2. 좌우합작의 선봉

미군정은 건준을 좌익 단체로 간주하고 해체를 요구했으며, 여운형은 이에 따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9월 6일) 직후 실질적으로 활동을 접었다. 이후 그는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한 중도 정치세력의 마지막 시도로, 1946년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하며 공식화되었다.

 

3. 암살 사건의 발생

3-1. 사건 개요

  • 일시: 1947년 7월 19일 오전 10시 45분경
  • 장소: 서울 혜화동 로터리 부근(현 대학로 일대)
  • 상황: 여운형은 그날 동지들과의 면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승용차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이동하던 순간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그는 가슴과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3-2. 범인의 신원

당시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자가 없었으며, 한동안 수사는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한지근'이라는 인물이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다.

  • 한지근(韓智根): 대동청년단 소속, 반공 우익세력에 속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 그는 사건 이후 은신 중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여운형 암살을 자백하였다.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사망함으로써, 그의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운형 암살사건 전말과 역사적 의미

4. 배후에 대한 의혹

여운형 암살사건은 단독범의 단순 범행이었는가, 아니면 조직적인 정치적 테러였는가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4-1. 우익단체의 개입설

  • 한지근은 대동청년단이라는 극우 반공 단체의 일원이었으며, 해당 단체는 당시 친미우익 계열의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 암살 직전, 한지근은 대동청년단 내에서 '여운형 제거'를 위한 논의를 들었다는 진술이 전해지기도 했다.

4-2. 미군정 방조 의혹

  • 여운형은 미군정으로부터 좌익세력과 협력한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 일부 사료에 따르면, 미군정 내부에서도 여운형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그를 배제할 필요성을 논의했다는 보고가 존재한다.
  • 그러나 미군정이 직접 암살에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4-3. 이승만 세력의 배후설

  • 당시 이승만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 정치적 경쟁 관계였던 여운형의 제거는 이승만 계열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 그러나 직접적인 연관 증거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5. 사건의 파장

5-1. 중도세력의 붕괴

여운형의 암살은 좌우합작운동을 사실상 좌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주도하던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은 중단되었고, 이후 중도파는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5-2. 남북 분단의 가속화

여운형은 남북 협상과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의 제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결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5-3. 정치테러의 정당화

여운형 암살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본격적인 정치 테러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이후 장덕수(우익 정치인)도 암살되었고, 좌익·우익 간 보복성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며 극심한 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6. 역사적 재조명과 평가

6-1. 재심의 어려움
여운형 암살은 해방공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나, 암살범의 사망과 당시 사법제도의 미비로 인해 진상 규명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6-2. 학계의 평가

  • 여운형은 ‘좌우합작’이라는 정치적 중용의 길을 꾀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 그는 민중의 지지 기반을 가진 몇 안 되는 대중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제거는 민주주의의 초기 싹을 자른 결과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 동시에 당시 그의 노선은 양극단의 불신과 공격 속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현실적 한계도 지적된다.


여운형 암살사건은 단순한 개인 암살 사건이 아니라, 해방공간의 정치적 갈등과 좌우 대립, 외세의 개입과 내부 분열이 만들어낸 복합적 비극이었다. 그의 죽음은 중도와 통합의 길이 배제되고, 극단적 이념 대립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는 이처럼 갈등과 분열 속에서 형성되었다.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암살은 그 시작점에서 가장 중요한 기로 중 하나였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지금도 ‘통합’이라는 가치에 대해 되새기게 한다.

 

여운형 암살사건 전말과 역사적 의미

 

참고자료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운형의 생애, 정치 활동, 암살 사건과 관련된 1차 사료와 연표를 제공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 근대 사료 DB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국 근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2. 국가기록원

해방 직후 정치 상황과관련된 정부 문서 및 기록을 제공합니다.

 

3.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여운형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 자료와 연구 논문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4.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여운형 관련 도서, 논문, 신문 기사 등을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