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대의 증언》
1편. 구한말, 조선이 흔들리다: 개항과 근대화의 갈림길
- 강화도조약의 의미와 개화파 vs. 척사파의 대립
- 열강의 침입과 자주권 약화
19세기 중반, 조선은 격랑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오랜 시간 ‘은둔의 나라’로 살아온 조선은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열강의 문 앞에 서게 되었고, 오랫동안 지켜온 체제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개항'이라는 말 한 마디가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개항 이전의 조선 사회, 강화도조약의 체결, 그리고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등을 중심으로, 조선이 근대화를 앞두고 어떤 갈림길에 서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19세기: 정체된 정치와 내우외환
19세기의 조선은 외부보다 내부의 균열이 먼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도정치의 장기화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었고,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며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민중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대규모 민란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홍경래의 난(1811), 임술농민봉기(1862) 등은 민중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개혁적 정책을 추진하며 조정을 정비하고자 하였지만, 외세에 대한 극단적인 배척은 결국 국제 정세를 오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외세의 등장: 대포를 앞세운 서구 열강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뒤흔들던 시대입니다. 아편전쟁(1840~42)을 통해 청나라가 굴복당하자, 서구 열강은 조선도 곧 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게 됩니다.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무력 시위를 벌였고, 프랑스는 병인양요(1866),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으로 조선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조선은 대외적 압력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강화도조약(1876)입니다.
강화도조약: 문을 연 대가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근대사를 뒤흔든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자주국'이라 명시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했고, 일본에게 해안 측량권, 부산·원산·인천의 개항권 등을 보장하는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조약은 조선이 본격적으로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일본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이 잇따라 통상조약을 요구하며 조선의 자주권은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개화파 vs. 척사파: 조선을 위한 두 길
개항 이후 조선 사회는 갈등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가장 큰 논쟁은 바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를 두고 두 흐름이 등장합니다: 개화파와 척사파입니다.
✔ 개화파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자는 입장입니다. 대표 인물로는 박규수, 김옥균, 홍영식 등이 있으며,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인물들도 이들입니다.
✔ 척사파
서구 문물과 외세를 배격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들입니다. 위정척사운동의 주역으로 유인석, 이항로, 기정진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외세를 ‘이적(夷狄)’으로 규정하고, 민족의 고유 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두 입장은 모두 조선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서로에게는 치명적인 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념적 갈등은 조선 사회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강력한 체제 전환에 필요한 공감대 형성에 실패하게 됩니다.
조선은 왜 준비되지 못했는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서구식 근대화를 단행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내부 권력 투쟁과 사대주의적 외교, 전통질서에 대한 지나친 고수로 인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개혁과 보존 사이에서 일관된 노선이 없었고, 준비되지 않은 개항은 곧 외세의 침탈로 이어졌습니다.
개항의 의미: 근대화인가, 식민지화의 서막인가?
개항은 단순히 무역을 위한 문호 개방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조선’으로서의 주체성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조선은 결정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이후 일본의 침략, 국권 피탈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항은 조선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실질적인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신문물, 신사상, 인쇄술, 철도, 통신 등 다양한 변화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유입되었고, 훗날 독립운동의 토대를 이루게 되는 사상적 기반 또한 이 시기에 형성됩니다.
조선 말기의 개항과 근대화는 단순한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 어떤 나라가 되고자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흔들렸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