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대의 증언》
조선의 개혁과 외세의 간섭
- 갑오개혁의 추진 배경과 제도 개편
- 갑오개혁의 한계와 역사적 평가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충돌
1894년, 조선의 농민사회는 격변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지방 반란을 넘어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전국적 규모의 민중 항쟁으로 확대되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오히려 일본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습니다.
그 결과, 조선 땅 위에서 청일 양국의 군대가 충돌하게 되었고, 곧 청일전쟁(1894.7~1895.4)이 발발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혼란과 군사적 긴장 속에서, 조선 조정은 일본의 압박에 따라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내각이 주도한 것이 바로 갑오개혁(1894~1896)입니다.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12월): 과거제 폐지와 신분제 철폐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직후인 1894년 7월 25일, 김홍집은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특별 개혁기구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제도 개혁에 착수합니다. 이 개혁의 핵심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고 근대적인 행정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요 개혁 내용:
- 과거제 폐지: 오랜 세월 유지되던 과거 시험 제도가 폐지되어 관료 임용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 신분제 폐지: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이 사라지고 법적으로 모든 백성이 ‘평등한 국민’으로 인정받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 은본위 화폐제 도입: 청나라식 화폐제 대신 일본식 은본위제를 도입하여 경제의 근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 재정 일원화: 궁내부와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분리하여 국왕과 정부의 경제를 구분하였습니다.
- 조세제도 개혁: 조세를 금납제로 통일하고, 도량형을 일원화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국가의 수입을 정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개혁은 철저히 일본의 군사적 뒷받침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자주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외세의 간섭 아래서 진행된 체제 개편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1895년 5월): 홍범 14조와 신교육 체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한 상황이 되자, 조선 정부는 개혁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합니다.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하고, ‘홍범 14조’(1894.12.12)라는 헌장 형식의 개혁 지침이 공표됩니다.
홍범 14조 주요 내용:
-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하고, 입헌군주제적인 요소를 반영
- 모든 인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명시
- 근대적 경찰 제도 도입, 지방관의 권한 축소
- 국가의 모든 세입과 지출은 법령에 근거하도록 함
또한 이 시기에는 근대 교육 제도도 도입됩니다. 한성사범학교 설립과 더불어 유년 교육을 위한 소학교 설치가 논의되었습니다. 이처럼 제2차 갑오개혁은 조선 사회 전반에 대한 근대화를 시도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개혁 역시 일본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된 점이 강했고, 특히 동학군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1896년):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
1895년 4월, 일본이 청나라와의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승리를 확정지은 이후, 조선 내부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더욱 노골화됩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제3차 갑오개혁, 즉 을미개혁입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일본이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단발령, 태양력 사용, 종두법 도입, 우편제도 확립 등의 근대화 조치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단발령(1895년 12월)은 유교적 전통과 민중 감정을 크게 자극하여 반발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는 도화선이 됩니다.
특히,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으며, 갑오개혁 전체에 대한 정당성도 크게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개혁의 평가: 개화인가, 강제인가
갑오개혁은 조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제도 개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혁의 추진 동력은 내부의 자생적 움직임이 아닌 외부 강압에 의한 것이었으며, 개혁의 수혜 역시 민중보다는 관료층과 일부 지식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이었던 ‘탐관오리 제거’와 ‘민본 정치 구현’은 개혁 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민중의 신뢰를 상실한 개혁이라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시대 키워드 정리
-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의 중심 세력
- 군국기무처: 제도 개혁을 담당한 기구
- 홍범14조: 2차 개혁의 개혁 강령
- 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사건
- 을미의병: 단발령과 왕비 시해에 대한 무장 저항
- 청일전쟁: 외세의 개입을 가속화한 국제전쟁
- 근대화 제도 도입: 교육, 경찰, 재정, 우편 등
다큐멘터리·도서 추천
EBS 다큐프라임 – “근대, 그 길을 묻다” (2012)
KBS 역사스페셜 – ‘명성황후와 일본 낭인들’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이태진, 『대한제국과 갑오개혁』, 일조각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동욱 민속학회 이사, 한국비교문학회 회장, 한국복식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문학개설』, 『한국가요의 연구』, 『고소설판각본전집』 등을 저술한 국문학자. 고전산문 인물
encykorea.aks.ac.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 현대 사료 DB 해방 이후 역동적이었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현대 중요 사료 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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